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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혼(試婚)궁녀"

by 외 계 인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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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시험연습 청나라의 궁녀들 "시혼궁녀"

결혼을 앞둔 황족의 잠자리 연습삼아 관계를 가졌던 궁녀들이 있습니다.

시혼(試婚)궁녀는 단어그대로 풀어보면 "혼인을 미리 시험해보는 궁녀"라는 뜻입니다.

 

황실의 남자들이 혼인을 하기전 정식으로 먼저 혼인 관계법을 시험해 보는 것인데 즉 잠자리를 연습해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혼궁녀는 명나라때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있지만 공식적 제도로 황실에서 운영하기 시작하여 알려진것은 청나라 때부터입니다.

 

청나라 황실은 황실의 권위를 드높이고 황족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손 번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최대한 많은 자손을 얻기 위해 어린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조혼"이 관례로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13세에서 조혼을 하며 늦어도 황실의 법도로서 15세 이전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하는것이 정해져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린나이에 결혼을 하다보니 성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기도 전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꼬마 신랑들을 위해 청나라에서는 시혼궁녀를 두게 된것입니다.

 

황실남자들의 문제없는 결혼생활과 자손번식을 위해 제도로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잠자리 교육이라고 볼수있는데 이를 궁녀들을 연습삼아 먼저 관계를 가져보는것입니다.

 

 

청나라의 혼인궁녀는 크게 두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로 황제와 황자의 혼인 전 잠자리 연습상대인 시혼궁녀가 있고..

둘째로 공주 남편감의 혼인전 잠자리 연습상대인 시혼궁녀가 있습니다.

 

황제의 혼인전 잠자리 상대로서 존재했던 시혼궁녀의 경우 그 선발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고 역할 역시 구체적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습니다.

 

황제는 혼인 직전에 시혼궁녀들을 먼저 맞이 하는데 시혼궁녀들은 황제 보다 나이가 많고 성적인 지식이 충분한 8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시혼궁녀들은  황실에서 논의를 거쳐 까다로운 기준을 통해 선발된 궁녀들입니다.

8명으로 구성된 시혼궁녀들은 역할에 따라  사의(司儀), 사문(司門), 사침(司寢), 사장(司帳) 이라는 관직이 부여됩니다.

 

관직의 이름들은 국내에서 황제와 황후를 모시는 내명부에 부처들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들 8명이 실질적으로 시온궁녀로서 황제와 잠자리를 하는 궁녀들이며 이외에도 내명부에서 파견한 16명의 궁녀가 황제의 시온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16명의 궁녀는 직접 황제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8명의 궁녀가 황제와 잠자리를 하기 위한 침실을 준비하고각종 허드렛일을 도맡는 것입니다. 이들은 황제와 시험 궁녀들이 잠자리를 하는 동안에도 침실에 함께 들어가 있는데, 본격적으로 일이 치러지는 동안 숨소리나 침 삼키는 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고 합니다.

시혼궁녀들은 공식적인 관직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됩니다

시혼궁녀가 되면 그 이후로 더 이상 다른 궁녀들이 하는 일반적인 업무는담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시혼 궁녀를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그이후 황실의 다른 남자들의 시혼궁녀를 선발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황실내 시온 프로그램을 주도하는업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황실에 대를 읽는 업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것 자체로 궁녀로서는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되기 때문에 많은 궁녀들이 시혼 궁녀가되는 것을 꿈꾸며 큰 영광으로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일반적인 궁녀들과 같이 교대 업무를 하지않고도 높은 녹봉을 받기 때문에현실적으로도 궁녀들에게는 꿈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공식적인 제도에의해 황제의 잠자리를 돕는 업무였지만 남녀가 잠자리를 했는데 정분이 난 경우는 없었는가 싶지만 그러나 황제의 시혼궁녀의 경우에는임무를 끝마치고서는 이유로 다시황제의 승은을 입는 경우가 거의없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8명의 시혼궁녀가 동시에 황제와 잠자리를 했기 때문에 황제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적으로 황제의 곁에는 시혼궁녀 외에도 황후와 수많은 후궁들이존재했기 때문에 시혼 궁녀가 눈에 들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시험 궁녀가 황제의 승은을 입을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황제의 후궁관계가 더욱더 복잡해져서 황실에 권력관계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시혼궁녀가 황제를 다시 알현하는 것을 황실 차원에서 막고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자의 잠자리 연습 상대로서 존재했던 시온궁녀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간혹 황자의 승은을 입는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는 황자의 아이를 임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황자는 정해진 혼인상대와 혼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족의 후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황자의 아이를 가진 시혼궁녀 역시도 황자의 후궁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청나라 황제들은 황족번영을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았던 탓에 황자들도 굉장히 많았고 당연히 황제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황자들보다 그렇지 않은 왕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을것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황자들은 후궁을 많이 둔다고 하더라도 황실에 권력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황실의 권력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황실 자손 번영을 위해 임신한 시혼궁려를 황자의 후궁으로 만든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황자들의 경우에는 어린 나이에 시혼을 경험하게 되면서 왜곡된 성관념을 가지게 된 경우가 황제에 비해 유독 많았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황자의 수가 황제보다 많았기 때문에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높기도 했고 황자의 시혼은 황제의 시혼만큼 엄격하게 관리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황실에는 황제와 황자 이외에도 공주의 부마가 될 후보에 대한 시혼도 존재했습니다.

이는 황제 황자의 시혼에 비해 그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데 명나라 시절 발생했던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공주의 남편감에 대한 시혼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명나라 시절 한 공주가 부잣집 자재를 부마로써 맞이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부마는 폐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고 합니다. 구마의 아버지가 아들이 몸이 유약하여 혼인하지 못할까봐 걱정한 나머지 공주의 부마 후보를 물색 담당관리에게 뇌물을 먹여 아들을 공주에게 장가보낸 것입니다.

 

부마는 혼인 당일날 혼례를 다 치르지도 못하고 쓰러질 정도로 유약했다고 합니다.

본인을 마치고도 부마는 몇 달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공주는 이후 몇 년간을 독수공방하며 우울감에 빠져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황실에서는 공주의 부마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혼을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부마의 시혼궁녀가 황제, 황자의 시혼 궁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황제, 황자의 시혼궁녀는 그들의 잠자리 연습을 돕고 자손을 번창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졌지만 부마의 시온 궁녀는 그러한 목적외에도 부마 후보가 공주의 남편감으로써 적당한 사람인지를 검증하는 역할도 맡았던 것입니다.

부마의 시혼궁녀는 황태후와 황후가 직접 도맡아서 선발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기준은 황실 규정으로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니며 황태후와 황후가 융통성을 갖고 공주에 취향도 고려해서 선발했다고 합니다. 공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과 미리 잠자리를 할 여자를 뽑는 것이기 때문에 황태구와 그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마의 시험궁녀 중에서 상당수는 기존 공주의 몸종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부마의 시험궁녀는 부마 후보와 잠자리를 한 후에 부마 후보에 관한 일거수 일투족을 황실에 모조리 보고했다 합니다.

부마 후보의 건강상태는 물론이고 그의 외모 풍채 신체적인 특징과 남성으로서의 잠자리 능력 그리고 사소한 습관들을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황후에게 올라가게 되는데 황후는 보고 결과를 종합해서 부마 후보를 공주의 남편으로 맞이할 것인지 결정하게 됩니다. 

 

 

공주의 부마는 공식적으로 첩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마의 시험궁녀가 마음에 들거나 임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첩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부마와 시험궁녀 사이의 아이는 황실의 핏줄이 전혀 섞이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에 황족번영과도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마의 마음에든 시험궁녀들은 공주의 허락이 있다면 공주의 몸종으로서 공주부부와 함께 생활하며 사실상 첩의 역할을하며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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